부천 본점(직영) 머리 숱이 적어지고 있습니까?

나뭇잎이 우수수 떨어지고 있습니다.

울긋불긋하게 물든 잎들이 아직 무성하게 남아 있는 편이기에

마음을 차분하게 해주는 운치가 있습니다.

조만간 영하의 겨울이 다가오면 대부분의 잎들이 떨어질 것이며

분위기는 을씨년스러워지겠지요.

그러나

다시 새싹이 돋고 꽃들이 활짝 피고 나뭇잎이 무성해지는 내년에 대한 희망이 있으니

그 을씨년스러움은 잠깐일 뿐입니다.


 

머리숱이 적어지는 추세에 함께 오는 을씨년스러움 주변에는

오직 절망의 늪밖에 없는 걸까요?


 

저도 한 때는 머리숱이 많은 편이었습니다.

머리카락이 검고 윤기가 난다고,

돌아가신 외할머니가

머리카락을 가지고 칭찬을 해주신 적도 있었지요.


 

그런데...


 

제 머리카락도 우수수 떨어지고 있었고

드디어 대머리의 추세에 접어들게 되었고

한 때는 모자를 자주 쓰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이런 신문기사를 접하면

완전히 남의 일로 생각되지는 않았답니다.


 

이런 신문기사-

A씨는

지난해 10월

평소 짝사랑하던 B양의 남자친구이자 자신의 사회 선배인 C씨와 술을 마시던 중

적은 머리숱을 숨기기 위해 썼던 모자를 B양 앞에서 C씨가 벗기자 격분,

흉기로 C씨를 찌른 혐의로 기소됐다.

재판부는,

A씨는 사소한 이유로

술자리에 동석한 이의 가슴부위를 흉기로 찔러 살해하려다 미수에 그쳤다, 며

죄질이 좋지 않고 그에 상응하는 처벌(징역 2년 6개월)이 필요하다,고 판결했다. (2010. 4. 3)


 

A씨의 흉기사용을 옹호할 생각은 없습니다.

그러나 A씨의 분노가 충분히 이해가 되는 저로서는

재판부의 '사소한 이유로'라는 판단은 매우 경솔하고 천박했다고 지적하고 싶네요.


 

모자를 그렇게 벗기는 행위는

자존심을 극단적으로 짓밟는 선제폭력이었습니다.


 

어느 현자가 말했습니다.

이미 일어난 사건 그 자체는 바꿀 수 없지만

그 사건에 대처하는 우리의 태도는 바꿀 수 있다, 고.


 

머리카락이 우수수 떨어져가는 사건을 저지할 수는 없었습니다.

얼핏 머리카락이 나게 하는 약품에 광고를 본적도 있지만

주의깊게 읽지 않았습니다.

탈모를 저지할 수 있다고 생각지 않았습니다.

그런 약이 있다면 약사나 의사들 중에 대머리가 있을 턱이 없지 않겠습니까.


 

탈모 그 자체를 그저 자연의 흐름으로 받아들이며 무덤덤하려 했지만

머리카락 문제로 은근히 자존심이 상하는 순간들을 접하면서

행동반경이 위축되는 경험을 하곤 했습니다.


 

어떤 모임에 나갔을 때

머리숱이 적은 자가 인사를 한답시고

형씨도 머리숱이 저처럼 없네요,라고 하거나

친척 모임에 나갔을 때 굳이 머리카락을 화제에 올리고는

점점 대머리가 되고 있네, 라고 하거나

이발소에서, 주변에 다른 손님들도 대기하고 있는 상황에서

이제 늦었어요, 대머리가 되시겠네요, 라고 하는 말을 들을 때

유쾌하지 않았습니다.

 


그 이발소에는 다시 안 갔지요.

내 머리 숱 줄어드는 것에 뭐 보태준 것 있니?

하며, 코뿔소처럼 들이받고 싶은 충동을 참아가면서

이발을 하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모든 어버이들은 자식이

잘 되면 기뻐하고 잘 안 되면 슬퍼하십니다.

제 머리 숱이 줄어들어갈 때

제 어머니는 슬픔을 표현하신 적이 있습니다.

머리 숱이 줄어드는 것은

어머니에게 불효로 작용했습니다.

 

대책을 찾기로 했습니다.

가발이라는 것으로 대처하기로 했습니다.

가발을

절망에서 희망으로 나아가기 위한

차선책의 대안으로 생각하면서

신문에 광고가 많이 나는 업체의 제품을 먼저 떠올렸습니다.

'기존의 머리를 민다'는 정보는 거대한 장벽으로 다가왔습니다.

군대갈 때 길었던 머리를 짧게 자르는 순간에 심히 착잡했던 기억이 났습니다.

머리카락을 면도기 같은 것으로 밀어버리는 장면을 상상할 때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을씨년스러운 기분이 파도처럼 밀려들었습니다.

가격도 좀 부담스러운데다가,

그렇게까지 하고 싶지는 않다, 는 게

제 심정이었습니다.


 

약간의 방랑을 하다가

'모웰'을 찾았습니다.

 

 

모웰에서 처음으로 가발을 착용하고 나오려 할 때

10대 청소년으로 보이는 학생과

그 학생의 어머니인 듯한 분이 들어오는 모습을 봤습니다.

그 학생도 모자를 쓰고 있었지요.

약간 위축된 듯한 그들의 모습에서

엄마와 아들이 그동안 심각하고 또 심각한 고뇌의 시간을

통과하고 있었을 것이라고 짐작했습니다.

나의 어머니도 슬픔을 표현한 적이 있는데

자식이 10대이면 더 많이 슬프셨을 것 같네요.


 


모웰 건물의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올 때

저 학생이 가발을 씀으로써

어깨를 봄날의 진달래나 개나리처럼 활짝 펴게 되고

자신감과 활력을 회복하여

진취적인 노력을 더 잘할 수 있게 된다면,

모웰은 참 좋은 일을 한 것이 된다는 생각이 스쳤습니다.


 

우울한 절망의 수렁으로 빠져들어가는 누군가의 가슴에

활기찬 희망을 불어넣는다면

아름답고 멋진 일이겠지요.


 

가발을 처음 쓰고 밖에 나왔을 때

사람들이

'어머, 저 사람 가발 썼어'하며 주시하지 않을까,

불안감이 없지는 않았습니다.

바람에 날려 가발이 벗겨지지는 않을까,

두려움도 약간 있었지요.


 

집에 왔을 때

어? 머리가 어떻게 된 거지?

하는 가족에게

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심었다!


 

그때 가족은

야, 요즘 기술 좋네!

라고 했죠.

가까운 곳에서

가장 자세히 보는 가족이

가발을 가발로 여기지 못했습니다.


 

일차 관문 확실히 통과^^


 

1~3주를 지나면서

단 한 사람도 가발이라고 의심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모웰 덕분에,

조금 귀찮았다고 할 수 있는 부분

한 가지가 있습니다.

그동안 모자를 쓰고 있는 모습만 보았던 이들 중에서

모자를 벗으니까 더 멋있는데 왜 그동안 모자를 쓰고 있었는가?

라는 질문을 하는 이들이 여럿 있었습니다.

그때마다

모자를 쓰면 더 활동적으로 보여서 그랬다, 고

똑같은 대답을 반복했습니다.


 

엄격하게 말하면

가발은 타인을 살짝 속이는 행위라고 할 수 있겠는데,

제 자신도 속을 때가 있습니다.

문득 가발을 쓰고 있다는 것을 잊을 때가 있으니

모자보다 착용감이 적다고 할 수 있겠네요.

모자는 이마 부분에 압박이 있는데

모웰 가발은 무언가에 눌려 있는 기분이 거의 없을 정도였습니다.


 

예전에 머리 숱이 많을 때에도 무스를 거의 사용하지 않았는데

요즘은 무스를 약간 사용하고 있습니다.

무스를 바르니 스타일이 좀 더 괜찮아 보입니다.


 

이제 제게서

머리숱이 줄어두는 추세에 의한 을씨년스러움은 대폭 사라졌습니다.

을씨년스러움, 불안감, 민망함, 두려움 등이 얽힌

가볍지 않은 마음으로 모웰에 처음 방문했는데
모웰 직원분들을 대할 때

마음이 편안해졌습니다.

그래서 바로 제품 계약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모웰 가발에 만족하고 있습니다.

제 가슴에
봄날의 새싹같은 새로움과 활력을 불어넣어주신
모웰 직원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제가 모웰의 제품을 선택하는데

'모웰체험기'의 글들도 판단의 근거가 되었습니다.

그 도움을

머리숱이 적어지면서 심각해지고 우울해지고 있는 분들께 전하고자

저도 체험기를 썼습니다.


 

아자 파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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